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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중일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
백여년전 한중일 근대사 궤적을 조감하면 3국의 근대화 성공여부의 선로가 선명히 부상한다. 중국과 한국은 늘 자부감을 느낄 정도로 ‘문’의 사회 였고, 일본은 반대로 ‘무’의 사회였다는 점이 일목 요연히 알린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의 핵으로 구성된 “문인”에 의한 문치 사회와 전통적 상무정신의 핵으로 이뤄진 일본의 무치사회는 지극히 대조적인 사회 및 문화패턴이었으며, 그 가치관, 행동양식은 역시 대조적으로 이질적 양상을 노정했다.
그런데 필자가 불가사이하게 느낀 것이라면, 지금 껏 중한일의 이 대조적인 문, 무 세계에 대해, 중국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문”이 한수 위이고, 우수한 반면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문화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열세로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중국과 한국이 야만의 무사에 일시 패배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오만해지며 문의 문화가 왜 무의 문화에 패배했는가 그 원인규명의 자아성찰은 거의 누락돼있다
필자가 동아시아 근대사 해독 작업에서 재발견 된 것은 우리가 일본무사문화를 그냥 “야만, 잔혹, 폭력”이라고 냉소적인 경멸로 일축할 사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언이폐지 하면, 근대 조선, 청국이 경시하던(지금도 변함없음) 무사 문화의 그 실속을 모른다면 그것에 패북당할 가능성이 없지않다. 이것은 근대 중, 한이 일본에 근대화 경쟁에서 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하며, 100여년이 지난 오늘 날 현대 21세기의 진로에도 이 원인에 의해 중한일의 미래가 규정당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럼 일본의 상무적인 “무사”의 행동양식, 가치관은 무엇일까? 역사에서 노정된 그 양상을 정리하면 그것은 “실무성”과 “혁명성”으로 귀추 할 수 있다. 우리가 늘 얕잡아서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낱말로만 일축 할 수 없는 근대적 원리가 일본의 무사 문화 속에 내재해 있다.
이에 비교해 지극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 중국과 한국의 유교정신을 토대로 한 독서인, 지식인 즉 文人문화의 “공론성(空論性)”과 “문약성”으로 귀추 되는 행동양식, 가치관이며, 항상 앉아서 쉽게 안이하게 이루려는 비생산적인 발상이다. 일본 무사가 늘 칼을 거머쥐고 생활의 현장에서 행동적인 것에 반해, 중, 한의 유교 신사, 선비는 늘 붓을 쥐고 탁상에 앉아 논쟁을 즐기며 생의 현장에서 행동, 실천을 기피해왔다. 생각만 하고 행동은 결여했던 치명적인 결점, 즉 행동력과 혁명력의 결여 그것이었다.
상대로 일본의 무사계급은 사고 한 뒤 그 플랭을 실천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이 신속히 따랐던 것이다. 상징적인 역사 인물을 들어 보자. 서양의 충격에 의해 개국을 하게 되는 데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그 행동양식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일본의 사카모토료마(坂本龍馬), 타카스기신사쿠(高杉晉作)등 지식인이며 무사인 그들은 당시 서양 열강에 통용된 국제법 저작 《만국공법》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권총사격술도 익숙했다. 이렇게 국제 지식과 실용적인 무기사용을 직접 장악 할 만큼 실무정신이 뛰어났다. 그러나 청국의 지식인들, 즉 문인들은 책만 붙들고 탐독하면서 논쟁 설전을 벌이기를 즐겼다. 위원, 엄복, 강유위 누구하나 실무적인 권총을 손에 쥘 생각조차 못했다. 조선의 선비들 박규수, 김윤식 당대 일류의 지식인 역시 사대주의적 공론에 치우쳐 두 번의 양유체험을 거치면서도 실용적인 “무”가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누구하나 제기하지 못했다.
과거(科擧) 제도의 시스템에 의해 문화력을 과시해온 문인 지배인 중국에서는 정말 문인 관료가 2만명, 무관 7000명이었으며 총 지방관원수가 200만도 안되었으나, 이 소수의 문인 엘리트 사회가 4억 남짓한 인구를 지배해나갔다. 당시 일본은 3300만 인구에 무사계급 189만의 방대한 체계로 일본 전체를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인 관료계급은 상대적으로 작은 숫자였지만 독립자주 할 필요 없이, 매판 무역에 의해, 국가의 봉록으로도 윤택한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본은 수출만으로 전무사계급의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무사들은 경제, 산업 개혁에 지대한 열성을 보이며 서양의 모방과 함께 “물건 만들기” 제조업에 힘을 기울인다. 원래 실무정신이 강한 그들은 부국을 강병의 토대를 하여 식산흥업에 혼신을 다한다. 1892년 일본 산업 기업 수는 3065개, 총 투자 수는 1억 6371만원에 달한다. 그런데 청국의 “양무운동”은 1860년에 시작해 산업의 수나 투자 수에서나 일본의 규모에 비교가 안 된다. 1894년 통계에 따르면 제조 기업이 15개, 총 투자수가 2796,6만원이다. 양무파와 민간기업 수나 투자액에서 일본과 전혀 견주지 못할 저수준에 머물렀다.
문인 계층의 엘리트들이 주도한 근대 중국의 유신은 실무정신과 혁명성에서 모두 일본을 뒤따를 수 없을 만큼 박약했다. 일본의 근대공업이 “물건 만들기” 제조업적인 실무 형에 비해 중국의 경제모델은 과잉노동력, 인재, 기술 부족 하에서 “배를 만들기보다 배를 사는 편이 낫고, 배를 사기보다 빌리기가 낫다”는 안이한 쉬운 산업원리를 고안 해냈다. 그리하여 자기민족의 기간산업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경제 산업의 근대화는 “그림의 떡”에 그쳤다.
사실 따져보면, 백년이 지난 오늘도 이 같은 기업원리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개혁개방 40년이 되어 오도록 방대한 민족 기간산업이 축적, 형성되지 못하고 세계의 기업을 위해 알바를 하는 “세계 공장”이란 한계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근대 문인계급의 혁명, 개혁에서도 혁명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귀족계급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일본의 무사들은 새로운 서양 관념과 기술에 그 실무성과 혁명성을 발휘하여 익숙히 수용하여 과학과 사상을 토대로 한 근대화 모델을 터득한다. 그들이 우선 목을 벤 것은 자신들의 목이었다. 혁명의 목표도 뚜렷했다. 중국과 조선은 다 같이 문인계급의 결정적인 결함으로 근대혁명은 산업면이나 사상면 사회면에서도 성사 시킬 수 없었다.
근대 한중일의 성공여부는 사실 문인과 무사의 행동양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가지 문화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비교, 분석, 성찰할 의미는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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